여 그 상서로운 자취를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힌 지식수라고 이름했다.
일찍이 그는 우리나라의 복식이 제하(諸夏-중국)와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
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였다. 이에 진덕왕 3년 기유(649)에 처음으로 중국 衣冠을 입게
하고, 다음 해인 경술(650)에 또 정삭(正朔-정월초하루)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의 연호
를 썼다. 이 후부터는 중국에 조근할 때마다 상번(上蕃-상위의 번국, 번국은 제후의
나라.)에 열(列)하였으니 자장의 공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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